영화 거리의 악사는 1987년, 이혜영, 이미숙, 정동환, 이덕화 네 명의 명배우가 엮어낸 한 시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서울로 떠난 재희와, 지방에 남은 서하. 두 여고 동창생 사이에 놓인 사랑과 갈등, 그리고 두 남자 윤수와 정태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인생의 선율.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삼각관계 멜로가 아닙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진정한 힘은, 끝내 말하지 못한 진실과, 침묵으로 지켜낸 사랑, 그리고 죽음 이후에야 밝혀지는 용서의 순간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길 위에 선 친구, 그리고 어긋난 사랑
재희(이혜영)와 서하(이미숙)는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졸업 후, 재희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며 새로운 세상과 도전의 삶을 택했고, 서하는 지방 소도시의 제약회사에 취직하며 보다 현실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서하는 그곳에서 회사 사장의 아들인 윤수(정동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윤수는 열차에서 우연히 재희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고, 그 인연은 약혼으로 이어지며 서하와의 사랑은 이별을 맞이하게 됩니다. 윤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서하는 말없이 그 사랑을 가슴에 묻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 속 여성의 삶과 사랑이 얼마나 한계와 고통에 부딪혔는지를 이 영화는 절제된 톤으로 보여줍니다. 이 장면들은 누구보다 현실에 순응하며 묵묵히 견뎌내는 서하의 인생을 강하게 부각시키며 관객의 감정을 조용히 흔듭니다.
두 번째 사랑, 그리고 묵직한 비밀
시간이 흘러 서하는 약학대학에 진학하고, 모든 걸 잊고 새 출발을 하려는 서하 앞에 정태(이덕화)가 나타나지만, 입대 후 베트남전에 참전할 것이라는 뼈저린 소식을 전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서하는 윤수의 도움으로 대형 제약회사에 취직을 하고, 결국 재희와 관계를 정리하려는 윤수는 서하 앞에 다시 나타나 다시 시작할 것을 종용합니다.
서하는 정태와 결혼해 아들 ‘영진(김경락)’을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립니다. 그들의 삶은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그 안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은 커다란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정태는 사실, 스스로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영진(김경락)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며, 서하에게 그 진실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그 사실을 끝까지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서하 역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진실을 꺼내는 순간 깨질 가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말하지 않은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장례식장에서 드러난 진실, 그리고 진짜 어른이 된 이들
서하는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는 끝내 영진의 출생에 대해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정태는 조용히 윤수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영진… 당신 아이야.”
그 말은 단지 피를 나눈 아버지라는 고백이 아니라, 정태 자신이 얼마나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사랑을 지켜왔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윤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자신과의 인연이 어떤 운명을 남겼고, 서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 누구도 분노하지 않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침묵, 그리고 용서입니다.
정태는 여전히 영진의 아버지로 남고, 윤수는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지만 서하의 뜻을 존중합니다. 이 영화가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기는 이유는, 갈등의 순간조차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 이들의 어른스러운 감정 처리 방식에 있습니다. 이런 ‘침묵의 드라마’는 오늘날 보기 드문 품격 있는 서사입니다.
결론: 끝내 말하지 못한 사랑, 그러나 영원히 남은 진심
거리의 악사는 사랑에 대해 가장 성숙한 시선을 가진 영화입니다. 그 사랑은 열정적이지 않지만 진중하고, 말로 다하지 않지만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정태의 사랑은 서하를 위한 선택이었고, 서하의 침묵은 아들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윤수의 받아들임은 세 사람 모두의 삶에 마침표를 찍은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삶의 문을 열게 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진실은 반드시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진실보다 더 깊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답을 줍니다. 그 사랑은 말보다는 이해로, 고백보다는 헌신으로, 그리고 떠난 후에도 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갑니다.